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과정 == 당초 상당수 정치인들이 [[대법원]] 판결에 의해 규제가 풀리자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등 구 [[신민당(1967년)|신민당]] 출신 인사[* 당시 [[양김]]은 아직 정치 규제 대상자였기 때문에 공동의장을 맡고 있던 민추협 내 인사들을 신당에 대거 합류시켰다.]들은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전두환 정권]]은 어떻게든 신한민주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꼼수를 부렸는데[* 당시 선거 제도상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을 얻는 건 기정 사실이었다지만, 선명성을 강조하는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에 오를 경우에는 사사건건 정부와 여당을 걸고 넘어질게 뻔했기 때문에 청와대 입장에서 신한민주당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애초에 신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려던 것을 거부한 것도 모자라, 약칭조차 신민당을 쓰지 못하게 딴지를 걸었고[* 실제로 선거 당일 [[MBC]]의 [[개표방송]]에서는 신한민주당의 약칭을 '''신민'''이 아닌 '''신한'''을 사용했고, 호칭도 '''신민당''' 대신 '''신한당'''내지는 신한민주당 풀 네임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민주한국당|민한당]]은 물론이거니와 '''여당부터가 [[민주정의당|민정당]]이라는 약칭을 쓰고 있었던지라''' 결국에는 흐지부지되었다.][* 참고로 신민당은 1967년 통합된 [[신한당|'''신'''한당]]과 [[민중당(1965년)|'''민'''중당]]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무엇보다도 관행상 3~4월에 치러지던 국회의원 선거를 __[[2월 12일]]__로 앞당겼다.'''[* 참고로 그 이전까지 [[음력]] [[설날]](구정)이 휴일이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1985년 [[2월 20일]])을 하루짜리 공휴일로 지정한다.] 이로 인해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창당한 지 불과 보름도 채 안되어 선거를 맞이하는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의 [[신상우]] 사무총장을 비롯한 몇몇 주요 인사들은 정권의 협박으로 인해 신한민주당 합류를 못하는 등의 정치 공작도 있었다. 신상우의 경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서울분실장 방준필이 불러서 나갔더니만,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 구속시켜 버리겠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공권력은 아주 많고, 당신의 사돈에 팔촌까지 죄는 만들면 된다."'''는 말로 탈당을 못하게 했다고. 게다가 당시의 선거 제도는 지역구당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인데다, 지역구 1당이 전국구 의석의 2/3을 독식하는 것 이라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과반 획득은 기정사실이었다. 특히 당시는 아직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한 호남 지역에서도 민주정의당이 의석을 확보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이 선거의 전남 지역 개표결과를 보면 광주를 제외하곤 전부 민주정의당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대도시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의 지지세는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결정적으로 정권에 마음을 돌린 건은 다름 아닌 언론의 편파 보도였다. 총선을 앞두고 [[KBS|양대]] [[MBC|방송사]]에서 아예 대놓고 [[땡전뉴스]]를 비롯하여 정권에 유리한 편파보도도 모자라 '''전비어천가 드라마'''를 편성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 KBS 감사 강동순의 저서 참조. 결국 [[KBS]] 사장 [[이원홍(1929)|이원홍]]과 [[MBC]] 사장 [[이웅희(정치인)|이웅희]]는 신한민주당 [[김재광]] 선거대책본부장에 의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2110020921101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2-11&officeId=00020&pageNo=11&printNo=19495&publishType=00020|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었다]]. 이런 식의 편파 보도는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판세가 차츰 신민당에게 유리해지는데, 특히 대학생들의 신민당 유세참여 및 대도시 지역 합동연설회가 큰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된다. [[1980년]] [[5월 17일]] 이후로 5년 간 언로가 꽉 막혀있다보니[*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 초기인데다가 [[민주정의당|여당]]과 [[민주한국당|관제]] [[한국국민당(1981년)|야당]]이 서로 나눠먹는 식이었기에 국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선거이므로 제외.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보면 사실 민주화 이전 선거는 대부분 관권선거의 영향이 강했기에 국민의 뜻이 상당히 왜곡된 선거긴 하다. 그런데도 득표율 면에서 여당이 밀린 건 당시 민심을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대도시에서는 선명 야당을 내건 신민당의 합동연설회에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일부 대학생들은 여당인 민정당과 당시 제1야당인 민한당 연설회장에 야유를 보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용자짓을 감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1985년 2월 5일에는 대학생 2명이 동작지구 유세장에서 연설 중이던 민정당 [[허청일]] 후보에게 암모니아를 투척하는 사건도 있었으며, 이 현장이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1155934|카메라에]] [[https://www.yna.co.kr/view/AKR20200103065100005|잡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신민당 연설회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나[* 물론 5.18 당시 광주를 취재한 외신 기사를 인용해서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대놓고 주장했다가는 [[코렁탕|정부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등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들이 연설회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폭로되면서 이목을 집중시켜 놓았다.[* 물론 중앙언론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알다시피 당시엔 정부가 대놓고 언론통제를 걸었기 때문.] 그리고 연설회 현장에 있었던 유권자들의 구전을 통해 대도시 지역 주민들에게도 이런 내용들이 전파되며 신민당에 대한 지지세가 알게 모르게 확산된 것. 거기에 [[김영삼]]과 함께 재야의 거목인 [[김대중]]이 선거 4일 전인 2월 8일 오전에 전격적으로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물론 당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내란죄]]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 상태였기에 귀국 직후 [[김포국제공항]]에서 동교동 자택으로 직행해야 했다.] 야당을 향하는 표심이 결집하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